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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한극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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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8-28 10:08 조회15,3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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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5/4/18
어원적 고찰부터
[독자 편지] 독도 어원적 고찰 지명 작성 원리로 볼 때 다케시마는 독도와 무관 입력 : 2005.04.18 18:03 / 수정 : 2005.04.18 18:52
  • 200504180247_00.jpg
  • 이응백/서울대 명예교수
  • 어느 지명을 정할 때에는 그 유래나 산물, 소재(素材), 생김새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겠다. 가령 대마도(對馬島)를 일인들이 ‘츠시마’라고 하는 것은 그 섬이 두 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두 섬’이라 한 데 대한 일본식 음사(音寫)라 하겠다. ‘두’의 일본음은 ‘츠’가 된다. 가나의 ‘다디두데도’를 ‘다지츠데도’로 한 것과 같이 ‘두’를 ‘츠’라고 한 것이다.
    ‘섬’의 음사는 두 음절로 바꾸어 ‘시마’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츠시마’는 곧 우리 말의 ‘두 섬’에 일본식 음사일 뿐이다. 서울에 ‘뚝섬’을 독도(纛島)라고 표기한 것은 한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뚝’을 쌓아 그 지역이 ‘섬’과 같이 되었다는 유래를 나타낸 말이다.
    독도는 한자로 獨島라고 표기하지만, 작고 큰 섬으로 된 독도가 홀로 선 섬이 아니므로, 그것은 ‘돌섬’이란 뜻인데, ‘돌’의 경상도 방언이 ‘독’이므로 한자음을 취해 獨島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소재에 입각한 이름이다. 죽도(竹島)라고 하면 대와 관련이 있어야 할 텐데, 독도에서 대를 어찌 했다든지, 바위섬에 대가 살 수 없어 지금도 대를 볼 수 없으니, 竹島라는 명칭은 가당치도 않다.
    따라서 ‘다케시마(대섬)’는 독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지명이므로, 어원적으로 볼 때 이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된다. ‘다케시마’는 ‘독도’가 아니므로 딴다리를 긁는 셈이다.
    (이응백·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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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99/10/6
싱겁게 끝난 독도 논란
입력 : 1999.10.06 19:21
  • 199910060425_00.jpg
  • ## 청운각 심야 담판 ##
    1965년 2월18일 서울에서 있었던 이동원-시나 한일외무장관 회담은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권과 구조약 문제를 놓고 팽팽한 입장 차이만
    보이고 별 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날 밤 우이동의 요정 선운각에선
    양측 대표들 사이에 만찬이 있었다. 시나는 밴드가 한국유행가를
    연주하자 가만히 듣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중국노래도 들어보았지만 이처럼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소.
    역시 우리 두 나라는 역사의 밑바닥에 깊은 무엇이 흐르고 있는 게
    분명하오."

    사진설명 :
    시나(왼쪽.1965년 방한 당시 )와 윤보선(오른쪽.1961년 대통령 시절 사진)은 서로 닮았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시나는 만찬을 파하고 헤어지기 전에 이장관에게 "조용한 데서
    이야기할 게 있다"고 붙들었다. 별실에서 시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이장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이름)는 어떻게 할
    작정이오? 사토 수상의 특별지시도 있었어요. 외무성의 증거서류를
    보면 다케시마는 분명히 일본영토인데…"라고 했다.
    "우리에게도 대마도가 우리 땅이란 역사자료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마도와 독도를 바꾸지요."
    대화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다음날에도 외무장관 회담을 양측
    실무자들에게 맡겨놓고 이동원, 시나는 장관실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시나가 불쑥 말했다.
    "난 오늘 아침 영자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내가 나를 물러가라고
    데모를 벌이고 있었으니…."
    "예?"
    "거, 조선호텔 앞 시위 사진 말이오."
    야당인 민정당의 당수 윤보선 전 대통령이 시나 외상과 닮은 점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틀 전 환영만찬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시나는
    "내가 (윤보선 전대통령보다) 한 살 아래이니 동생이군요. 그런데 우리는
    같은 조상님을 둔 것이 아닐까요?"라고 해서 웃겼다.
    19일의 외무장관 회담도 실무자들 사이에 진전없이 끝났다. 구 조약
    폐기의 시기 문제는 의견 접근이 가능해졌다. 한일 양측 사이의 구조약은
    '이미 무효'란 의미로 'already(이미)'를 문장에 삽입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양국간 모든 조약의 무효
    시점으로 하자는 일본측과 1910년의 한일합병을 기점으로 하자는 한국측의
    주장을 절충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관할권 문제에 있어서는 진전이
    없었다. 일본측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임을 유엔 결의를
    빌어 인정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그 관할권은 휴전선 이남에 한정된다는
    조항을 넣으려고 했다. 한국측은 이를 전면 거부했다. 다음날이면 시나가
    귀국하게 되어 있었다. 사토 수상 등 일본정부 수뇌부도 '무리하게 굳이
    합의볼 필요가 없다'는 자세였다고 한다.
    이동원 장관은 오후 다섯 시쯤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보고했다.
    "각하, 구조약 문제는 우리가 양보할 수도 있는 사안이지만 관할권
    문제는 국기와 관계되는 일이니 만큼 양측이 모두 완강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박대통령은 언짢은 표정을 짓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마음대로 해. 나는 머리 좀 식히려 진해에 갔다올테니. 내가 임자를
    외무장관에 임명할 때 분명이 말한 것이 있잖아. 한일회담은 임자에게
    일임하겠다고. 그러니 임자 책임 아래서 최선을 다해봐."
    이날 저녁 조선호텔에서는 시나 장관이 주최하는 만찬이 열렸다.
    장기영 부총리가 이동원 장관에게 다가오더니 걱정을 해주었다.
    "회담이 잘 안되는 모양이지. 야단인데, 그게 잘 되어야 우리 경제도
    소생할텐데. 이판사판으로 밀어붙여 봐.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것 있잖아."
    이장관도 이날 밤에 승부를 내기로 결심을 한 터였다. 그는 시나
    장관에게 "우리끼리 조용한 데 가서 술 한잔 더 합시다"라고 했다. 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겸 한일회담 수석대표, 외무부의 연하구 아주국장, 그리고
    시나와 우시로쿠 아시아국장이 요정 청운각으로 향했다. 밤 10시를
    넘어서였다.
    일행이 대청에 올라서는데 "아니, 여긴 웬 일이오?"라고 하면서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육군중장 출신인 김종갑 국회국방위원장이었다. 김위원장을
    따라 방에 들어가보니 정복차림의 군수뇌부가 회식중이었다. 이장관은
    시나의 양해를 얻어 합석했다. 애주가인 시나는 늘 갖고다니는 나폴레옹
    꼬냑을 꺼내 마셨다.
    한국말을 모르는 시나는 군인들과 이장관이 뒤엉켜 고성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지금 무슨 일로 싸우는 거요?"라고
    묻기도 했다. 장군들은 두 외무장관에게 "두 분이 어떻게 하든지 이번
    회담을 성사시켜주십시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절대 안됩니다"라고 부탁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나는 일본으로 돌아가 남긴 회고담에서 '장군들과의
    조우는 박대통령이 회담성사에 압력을 넣기 위해서 꾸민 것이었다'고 썼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대좌한 두 장관은 배석한 사람들을 내보내고
    결판에 들어갔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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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5/4/10
한국, 샌프란시스코 조약때 대마도 영유권 공식 요구 1951년 美국무부 외교문서에 명시 입력 : 2005.04.10 17:01 / 수정 : 2005.04.10 17:01
  • 한국은 지난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이 조약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는다는 문구를 포함시킬 것을 미국측에 공식 요구했던 것으로 9일 밝혀졌다.
    연합뉴스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입수한 미국 국무부의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일본과의 평화조약 초안을 작성하고 있던 시기인 지난 1951년 4월27일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의 ’영토’ 부분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국은 정의가 영구적 평화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대마도의 영토적 지위에 대한 완전한 검토를 할 것을 요청한다”면서 “역사적으로 이 섬은 한국 영토였으나 일본에 의해 강제적, 불법적으로 점령당했다”고 말했다.
    이 문서는 또 “(초안의) 5번째 문단(paragraph)에서 일본은 사할린의 남쪽 절반과 모든 부속 도서 그리고 쿠릴 열도를 소련에 넘겨주도록 명령받는다”고 돼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사실을 고려해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고 말했다.
    당시 양유찬 주미대사는 그로 부터 약 3개월 뒤인 7월9일 국무부에서 존 포스터 덜레스 대사를 만나 대마도는 당연히 한국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대마도가 한국에 귀속될 것인가를 거듭 확인했다.
    그러나 덜레스 대사는 “대마도는 일본이 오랫동안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으며, 평화 조약은 대마도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답변,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었던 사실은 익히 알려졌으나 한국 정부가 국제적인 조약에 명시하도록 공식 요구한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밝혀진 것이다.
    (워싱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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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1/5/11

김상훈 대령, ’삼국접양지도’ 원본 내용 공개

일본이 1860년대 국제공인 고지도를 통해 대마도(對馬島. 일본명 쓰시마)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1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승만 포럼에서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점을 일본 정부 스스로 제시해 국제 공인을 받았던 지도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김 대령이 이날 공개한 ’삼국통람도설’은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가 1785년 작성한 책으로 일본과 그 주위 3국(조선, 오키나와, 홋카이도),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담은 ’삼국접양지도’ 등 5개 지도를 포함하고 있다.

일본은 1860년대 오가사와라 제도를 두고 미국과 분쟁하던 당시 독일의 동양학자인 클라프로스가 번역한 삼국접양지도의 프랑스어판을 증거로 제시해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지도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일본 영토라 규정했지만, 울릉도와 독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적었다.

삼국접양지도는 과거에도 여러 연구자에 의해 독도는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인용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인용된 자료는 원본이 아닌 흑백 필사본으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대마도는 색을 달리해 일본령으로 분류했다.

김 대령은 “과거에 공개된 필사본은 흑백이라서 대마도의 영토 구분이 어려웠다”면서 “원본은 분명히 대마도를 조선 땅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본은 독도연구 전문가인 한상복 박사가 호주에서 구입한 것으로 추정되며, 김 대령은 이 지도를 국회도서관 독도특별 전시관에서 찾았다고 설명했다.

김 대령이 대마도 연구에 천착하게 된 것은 2008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서 연수시절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문 저서를 접하면서부터다.

이 전 대통령은 1948∼1949년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바 있다.

김 대령은 “이 전 대통령의 요구는 아직도 타당하다”면서 “일본과 영토문제는 독도뿐 아니라 대마도까지 확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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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0/6/9

현정스님의 ’일본표해록’ 처음 번역, 출간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이 10일 간행할 예정인 ’일본표해록’은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증언을 담은 몇 안 되는 책 가운데 하나다.

전남 화순에 있는 쌍봉사의 화원승(畵員僧)이었던 풍계(楓溪) 현정(賢正)스님이 쓴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에 표류해 7개월여를 지냈던 기록을 담은 것이다.

현정 스님은 1817년 말에 해남 대둔사의 요청으로 경주에 천불(千佛)을 조성하려고 불상 768위를 싣고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일본으로 표류하게 됐다.



그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인들의 풍습과 조선인들에 대한 생각과 태도 등을 자세히 기록했는데 지금 봐도 흥미로운 부분이 적지 않다.

가령 당시
일본에서는 여성들이 조선인의 아이를 낳으면 나라에서 돈을 준다는 내용이나, 일본인들이 조선을 ’부처님의 나라’로 여기고 중국인들보다 더 극진하게 대접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왜녀가 우리나라 사람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나라에서 지극히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왜녀들이 반드시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자 한다. 그 사람들은 이 때문에 혹시라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정을 통하면 그 여자가 스스로 관부에 가서 말한다. 관부는 국왕에게 보고하고 출산할 달수를 계산하여 아이를 낳으면 관에서 돈을 준다.”(54쪽)

또 대화할 때 ’
일본’이라고 말하면 좋아하고 ’왜(倭)’라고 말하면 싫어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현정스님은 대마도를 거쳐 귀국했는데, 이 대목에서 대마도인들이 “우리도 조선인”이라고 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그가 대마도에 도착하자 대마도인들이 환영하며 “우리도 조선인”이라고 말했으며 그가 보기에 실제로 그들은 대부분 조선어가 능했으며 한번도 일본을 ’본국’이라 말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1818년 1월 조선인 표류민을 만났던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는 일본 화가 우키다 잇케이(浮田一蕙)의 그림 ’조선표객도’가 일본에 전해지고 있어 현정스님의 이 글의 신뢰성을 더한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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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9/10/29

부산외대 김문길 교수, 마산서 공개

대마도(쓰시마.對馬島)가 한국 땅으로 표기된 옛 지도 2점이 처음으로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부산외국대 일본어학부 김문길 교수는 28일
경남 마산문화원에서 열린 ‘대마도 고지도 전시회’에서 대마도가 한국 땅으로 표기된 ‘대마여지도(對馬與地圖)’와 사본을 전시했다.

대마여지도는 1756년 6월
일본 지리학자인 모리고안(森幸安)이 에도(江戶) 시대 막부의 명을 받아 제작한 뒤 공인을 받은 것으로 현재 원본이 교토 기타노덴만쿠(北野天滿宮)에 소장돼 있는 것을 김 교수가 찾아냈다.

2003년 출간된 모리고안 지도(森幸安地圖)에 수록된 이 지도에는 ‘부시준조선국지지례칙부향군령지470리(釜示准朝鮮國地之例則府鄕郡令之470里)’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대마도의 부ㆍ향ㆍ군 모든 법칙은 조선국 부산에 준한 것이다.거리는 470리다’라고 풀이된다.

김 교수는 “지난 여름 일본에서 이 지도를 찾아냈는데 사본으로만 볼 수 있어 아쉬웠지만 일본의 지리학자가 공식적으로 직접 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834년에 제작된 청구도 동래부 기장현은 현재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데 김 교수가 직접 확인해 사본으로 햇빛을 보게 됐다.

이 지도에는 ‘본예신라수로470리재동래부지동남해중지실성왕7년무신왜치영어차도(本隸新羅水路四百七十里在東萊府之東南海中至實聖王7年戊申倭置營於此島)’라고 적혀 있다.

이 글귀는 ‘대마도는 원래 신라땅에 예속되어 있고 실성왕 7년까지 동래부에 속한 섬으로 470리 거리 동남쪽 바다에 있다. 무신년에 왜(일본인)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김 교수는 “이 지도는 동래부 기장현을 중심으로 그린 것으로 대마도를 지금의
부산 동래부 기장현에 예속된 것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날 오후 마산문화원 초청으로 마산 3.15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동북아에 있어서 대마도 영토문제 연구’를 주제로 특강에서도 한국 땅으로 표기된 대마도의 실체를 알렸다.

김 교수는 ”역사를 되짚어 각종 자료와 고증을 통해 대마도가 한국 땅이고 그 땅에 대한 정확한 역사인식을 후세에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대마도의 실체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은 ”2005년 ‘대마도의 날’을 조례로 제정한
마산에서 한국 땅으로 표기된 대마도 지도를 처음으로 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며 ”고토 대마도에 대한 바른 역사의식을 함양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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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8/7/17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포함된 우리나라 고지도가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

청주의 이대성(48.청주시 흥덕구 사직동)씨는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지도를 17일 공개했다.

이씨가 공개한 지도는 당시 세계지도 격인 천하총도와 중국 전도, 조선을 8도로 나누어 한지에 인쇄한 10장으로 구성돼 있다.

8도 지도 중 강원도 지도에는 울릉도 바로 아래쪽에 독도를 우산(宇山)으로 표기해 놓았으며 경상도 지도에는 부산 아래에 대마도가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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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의 이대성(48.청주시 흥덕구 사직동)씨가 공개한 조선 고지도. 이 지도는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독도는 강원도 지도편에 대마도는 경상도 지도편에 포함돼 있다.

이씨는 “5대 할아버지 때부터 다양한 서책과 함께 이 지도가 전해져왔고 그동안 집에서 보관하고 있었다”며 “최근 일본이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는 자료로 활용되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이 지도를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상태 전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실장은 “이 지도는 조선 초에 처음 만들어져 계속 보충해 온 많은 지도 중의 하나로서 지도에 표기돼 있는 지명 등을 볼 때 영조 때인 18세기에 목판본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3천여 종의 지도에는 모두 독도가 우리 영토로 표기돼 있어 독도가 분명히 우리 땅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며 ”대마도의 경우도 행정력이 미치지는 못했지만 역사의식 속에서 조선의 땅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경상도의 지도에 항상 포함돼 있다“고 덧붙였다.
입력 : 2008.07.17 21:09 / 수정 : 2008.07.17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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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5/3/17

日총련발행 古지도 '대마도 독도 조선땅' 명기 입력 : 2005.03.17 10:55 / 수정 : 2005.03.17 11:01
  •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총련) 계열 출판사가 발행한 ‘최신 조선지도’(1999년 발행)는 울릉도, 독도는 물론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명기한 고지도를 수록했다.
    이 지도책이 ‘여러가지 옛지도’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조선시대 지리서인 팔도지도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에는 대마도가 조선 땅으로 표시돼 있다.
  • 200503170153_01.jpg
  •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총련) 계열 출판사가 발행한 `최신 조선지도'(1999년 발행)는 울릉도, 독도는 물론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명기한 고지도를 수록했다. 사진 왼쪽은 팔도지도(조선시기) 오른쪽은 팔도총도(1530년) /연합
  • 조선 성종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중종때 다시 만든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발간)의 팔도총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비슷한 크기로 그려져 있고 팔도지도에도 역시 울릉도와 독도가 표시돼 있다.
    대외홍보지를 발간하는 북한의 조국사(祖國社)와 백과사전출판사, 평양정보센터 3개 기관 협조로 만들어진 이 지도책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402년)와 함께 외국의 고지도로 기원전(B.C) 500년께 제작된 헤카타이오스 지도, 서기 150년께 제작된 톨레미 세계지도도 수록돼 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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