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姓氏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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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7-08-15 14:25 조회5,6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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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약

姓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부터 발생 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 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 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 모(母)만 확실히 알 수 있고  부(父)는 알수 없는것 이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모계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거니와,  모계(母系)사회건 부계(父系)사회건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시사회를 씨족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씨족사회는 씨족전원이 힘을 합하여 수렵, 어로, 농경에 종사하고 외구의 침입도 공동으로 방어하였다.  그리고 씨족사회는 그 집단을 통솔하기 위하여 씨족원 중에 가장 경험이 많고 덕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씨족장으로 삼고, 큰일이 있을 때에는 씨족회의를 열어서 결정하였는데,  이 씨족회의는 자못 민주적이어서 씨족원은 누구나 다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하고  씨족 전원의 찬성으로 결정하였다.   씨족사회도 시대가 흐르고 인구가 증가하고  대(代)가 멀어짐에 따라  자연히 같은 씨족중 에도 혈통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어  여러개의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자  자연히 가까이 있는 씨족들끼리 서로 합하여 더 큰 사회를 조직하고, 생산물을 교환하고 외적을 방어 하였는데,  이러한 사회를 우리는 부족사회라 한다. 부족사회에서는  씨족장들이 모여서  부족장을 선출하고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으며,  부족국가는 다시 부족 연맹체를 조직하고  부족연맹의 왕을 선출하여 국가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오늘날 사회학, 역사학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 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 산명, 강명으로 성을 삼았다.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姜氏)라 하고, 황제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살았으므로 성을 희씨(姬氏)라  하였으며, 순(舜)임금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씨(姚氏)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姓氏란 이름자의 첫글자를 말하며 "홍길동" 이라고 할때 洪자를 말하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surname라고 하여 "존 F 케네디"라고 할때 케네디를 말한다.

   ★ 삼국시대의 성씨발생

  고구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 유리왕이 사성 하였다는 위씨,우씨 또는 대무신왕이 사성 하였다는 낙, 부정, 대실씨 등은 전설이라고 하더라도 대무신 왕때의 을두지, 송옥구를  비롯하여  이후 재상급만도 목도루, 고복장, 명림답부, 을파소, 고우루,  명림어수, 음우,  창조리,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등의 이름이 있으며,  또 한  왕비나 왕모의 성으로 예, 송, 우, 연, 주씨 등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 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 중에서 고구려에 연원을 두는 성씨는 극히 드물다.
고씨는 고주몽의 후손이 강원도 횡성 지방에 약간 산재한다고 전해지고 그 외의 고씨는 모두 탐라 고씨계이다.
오직 강씨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는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있다.

   백제
또한 백제에서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또한 온조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우고 십제 공신이 되었다는  전섭과 마여를 원조로 하는 전씨와 마씨가 있다.
  
개루왕때 인물인 도미를 선계로 하는 성주도씨가 있으며, 백제가 망하자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 고종으로부터 새로 사성받고 웅진도독이 되어 귀국했다는 부여융을 시조로 하는 부여서씨가 있다.  
이 외에 백제 8대 성과 같은 성으로 진씨,연씨,국씨가 현재도 있기는 하나  그 연원이 분명치 않다

   신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의 기원은 아무래도 신라에서 연원한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박,석,김 3성과  이,최,손,정,배,설의 6촌성에서 연원을 찾는 것이 더 합리적 일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박(朴), 석(昔), 김(金) 3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7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직 성씨가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으며, 성씨가 쓰이기 전에는 신분을 표시하는 역활을 했던 것은 그 사람의 출신지이다.
다만 왕실에서는 24대 진흥왕 때부터 김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령 [양서],[신라전]에는 신라왕 모태가 처음 사신을 보내왔다'고  나와 있는데, 모태란 23대 법흥왕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북제서]에는 법흥왕 다음 임금인 진흥왕을 김진흥, 진평왕을 김진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왕실의 김씨를 제외한 그 밖의 6촌성들은 그보다 훨씬 뒤인 중기에야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다만 가락국의 시조로 알려진 수로왕의 12대손인 김유신은 제외이다.
김유신은  누이가 태종무열왕의 비가 되면서부터 김유신이 처음으로 김씨를 사용하게 된것 같다는 설도 있다.

신라 시대의 성씨로는 3성과 6촌성 외에 9세기 초 당나라에 갔다온 후 청해진 대사가 된 장보고가 처음 장씨로 등장하였고,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러서야 많은 새로운 姓의 등장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삼국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다시 추정해 보면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등이 사용되었으며
  
      ♠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등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삼국시대에도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 고려시대의 姓

신라 말기 후삼국의 대동란을 당하여  평민으로서 각지에서 일어난 상주의 원종(元宗) 애노(哀奴), 죽주(竹州),죽산의 기명(箕蓂),   북원(原州)의 량길(梁吉)-良吉,  태봉왕 궁예의 부장인 홍언(弘彦) 명귀(明貴), 후백제왕 견명(甄蓂)의 부장인 관흔(官昕) 상귀(相貴) 상달(尙達) 웅환(熊奐),  고려 태조 의 부장인  홍술(弘述), 백옥(白玉), 삼웅산(三熊山), 복사귀(卜沙貴)등은 모두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이 중에 고려 태조의 부장인 홍술, 백옥, 삼웅산, 복사귀는  고려 태조를 추대한 개국공신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의 초명으로서  그들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으로 개명한 것은 고려 건국 후 그들이 귀하게 된 뒤의 일이며, 아마 태조로부터 사성되었을 것이다.

고려 태조는 사성한 예가 많이 있다.
지금의 강릉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명주장군 순식(順式)이 귀순하자  태조는 왕(王)씨의 성을 주고,  발해 태자(渤海太子) 대광현(大光顯)이 귀순하자 또한 왕(王)씨의 성을 주고, 신라인 김신(金辛)이 태조를 보필하여  공이 많음에 권씨(權氏)의 성을 주어  안동권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또 ≪동국흥지승람(東國興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개국한 뒤  목천(木川)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우(午), 마(馬), 상(象), 돈(豚), 장(獐),과  같은 짐승의 뜻을 가진 성(姓)을 주었는데,  뒤에 우(午)는 우(于),   상(象)은 상(尙),  돈(豚)은 돈(頓),  장(獐)은 장(張)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어떻든 고려 초기부터  성을 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귀족, 관료 계급은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에 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문종시대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종 9년의 이 법령은 실로 우리나라 성의 한 시기를 긋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성이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 등 천인 계급에 이르러서는 조선 초기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 조선시대 이후의 성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호적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 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1486년(성종)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
 
최근의 조사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성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한 1939년의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 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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