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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건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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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7-08-09 18:33 조회9,2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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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의 대결국면이 소강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서구언론이고, 아랍언론이고, 한국언론이고 할 것 없이 헤즈볼라에 다소 동정적인 뉴스 보도 때문에 이스라엘은 죽일 놈이 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헤즈볼라 측에서 이스라엘의 폭격을 과장하거나 조작한 사진도 여러건 적발됐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도 잘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자국 군인 2명을 구하기 위해 국가가 최선을 다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테러 세력에는 단호한 결의와 실천을 보여주며, 주변의 아랍국가들이 모두 잡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을때 생존 차원에서 즉각적인 보복을 한다는 점에서는 이스라엘을 높이 평가합니다.
 
다만, 전쟁이란 어차피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범벅이 되어 죽기쉬운 사태라는 점을 감안해도, 유대인 역사에서 조금만 허점을 보였을때 그들이 잔혹하게 당해왔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래도, 이스라엘의 반격은 지나친 측면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중심적인 유대인의 판단 매커니즘과 사고 특성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지요.
 
그런데, 몇몇 관련 기사를 보면서 일부 언론에서 정확하게 보도하지 못하는 점이 있기에 이를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나라를 다시 세울때 팔레스타인 땅을 강제 점령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내쫓아 팔레스타인 난민이 됐다.....'는 비(非)역사적인 지적입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이 적극 도와주었고.....'란 그럴듯한 픽션까지 첨부됩니다.
어찌된 일인지, 국내에서 식자층이라는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Anti-Semitism에 쉽게 동화되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어찌해서든, 우선 2개의 탁월한 분석 글과 1개의 연표를 '펌'하여 소개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보다 정확한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합니다.
여러분께서 혹시 다른 역사적인 자료가 있다면 보내주십시오.
 
Meast-map.gif
 
 
 
[ 첫째 글입니다 ]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이 된 과정
 
2차 대전 전
 
팔레스타인 지역은 1917년까지 오트만 제국의 차지였다.(400년 이상) 로렌스와 알렌비장군의 합력으로 아랍연맹이 탄생하며 오트만은 물러나고 지금의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대부분과 이스라엘, 예루살렘, 서안뱅크, 가자지구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 영국자치령(총 넓이 8,940,374 km2 / 남한 99,646 km2  /현 이스라엘 22,145 km2)이 생겨났다.
 
팔레스타인 영국령의 영토(1920년 표식)
Palestine1920.jpg

 

이때는 이미 1870년 부터 불기 시작한 시오니즘의 영향으로 몇만명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에게서 합법적으로 돈을 지불하여 농장과 땅 등을 구입하여 속속 들어와 입주하기 시작하던 때이나 이미 팔레스타인 인들은 유태인의 이주를 폭력과 테러를 써가며 차단에 들어갔다. 원천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기 시작하며 이집트자치령에서 대량의 식량을 구입, 팔레스타인에 원조하고 수도 시설을 개량하여 전염병을 퇴치하였다. 새로운 철도와 통신을 확장했고 아랍인들의 오랜 부패를 근절했다.
 
이 기간 영국은 아랍에게는 아랍자치국 건설을, 유태인에게는 유태국가 건설을 각기 약속해주었다. (벨푸어 선언;1917)
 
당시 이 지역은 다민족이 거주하는 곳으로 1920년 조사에 의하면, 인구 75만명이고 무슬림, 베드윈(1922년 10만3천명), 그리고 유태인들(7~8만명) 외에 시리아, 수단, 체르케스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사우디아라비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2년 팔레스타인 자치령령이 국제연맹을 통과했는데, 여기에도 역시 유태인 국가 창설이 약속되었다. 그 문서의 많은 조항들이 유태인의 이주와 국가창설을 도울 것을 언급하였다.
 
1920년 그간의 유입 중 최대 숫자인 10만명의 유태인이 하스트루닷 운동에 의해 그 지역으로 이주했다. 비유태인은 6천명이 이주했다.
 
하스트루닷은 먼저 이주한 유태인들이 기금을 모아 새로운 이주민들이 유태농장을 경영하는 것을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었다.
 
유태인들의 이주는 초기에는 반대를 거의 겪지 않았으나 19세기 말부터 유럽에 불기 시작한 반유태 운동으로 이주민이 늘어나자 원주민들과 마찰이 심해졌다.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지도자들에 의해 유태인에 대한 폭력 테러가 부추겨졌다.  아랍인들의 너무 많은 공격에 대비키 위해 하가나(이스라엘 국회조직) 가 만들어졌다. (1920.6.15.)
 
1921,1929년의 아랍인에 의한 유태인 공격은 특히 극심했다. 1936-1939년도 극심했다.
 
1936년 유태인들은 지도자 이젤과 레히의 지도 아래 영국과 아랍인들에게 마찬가지 폭력시위를 하기로 했다. 이것이 영국정부로 하여금 그들을 테러집단으로 분류하게 만들었다.
 
1936-1939년은 마찬가지로 아랍혁명이라 불리는 새로운 아랍 사회주의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해다. 이 운동은 독일 히틀러 등장으로 추방이 늘던 유태인들을 특히 겨냥했고 후세이니 가문이 이끌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유태인들보다 아랍인들을 더 많이 살해했다. 그들은 이 운동을 자기네 정적을 처형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후세이니는 나중에 레바논으로 도망했으며 그후엔 이라크로 최종엔 1941년 독일로 들어갔다.
 
영국은 유태인들의 토지구입에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특히 팔 자치지구의 자치권--유태인과 협력하에 시행하기로 한-- 은 거부했다.
 
1939년 영국은 아랍에게 8500 에이커를 할당하고 유태인에게는 4100 에이커를 할당했다.
 
2차대전 기간과 그 후
 
2차대전 기간 아랍은 그들 간에 합치라는 것은 없으나 대부분은 유태와 영국에게서 팔레스타인을 빼앗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지도자들중  예루살렘의 그랜드 무티, 알 후세이니(이라크로 도주한)가 동맹국에 대한 지하드(성전)을 선언했다.
 
히틀러 독일은 아랍세계에서 영국을 제치기 위해 아랍을 지원했다. 아랍계 중 히틀러를 반대하던 일부 아랍은 팔레스타인군을 창설, 6천명의 팔아랍군과 2만6천명의 유태인군을 자원, 영국군에 들어간다.
 
1942년 롬멜의 지휘로 독일군이 수에즈 운하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자 팔레스타인이 독일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던 아랍, 유태인들과 영국은 팔마치라는 훈련정예부대를 창설하는데 이것이 나중에 하가나로 속하게 된다.
 
홀로코스트가 팔레스타인 상황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기간 영국은 팔레스타인에로의 유럽출신 유태인의 이주를 금했고 그들은 따로 아프리카 동남단 끝의 마우리티우스 국에 난민캠프를 짓고 수용했다.
 
1939년이 시작되면서, 시온주의자들은 불법이민단체 '알랴 벳'을 조직 '하모싸드 레알랴 벳'의 지휘하에 폐선 직전의 배들을 약탈해서 거기에 수만명의 유태인을 태워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킴으로써 홀로코스트에서 구출해냈다.
 
마지막으로 오던 배(스트루마)가 1942년2월 소련잠수정에 의해  격추되어 768명의 유태인들이 수장됐다.
 
알랴후 하킴과 알랴후 벳 주리(유태레히지하운동 멤버)가 1944년11월6일 영국의 고위정치가 모이네 경을 그가 스트루마 호의 팔레스타인 기항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카이로에서 암살했다. 모이네 경은 처칠과 가까웠으며 이 이유로 처칠은 그후 반시온주의로 돌아섰다.
 
이때 영국은 아랍에서 나는 기름 확보를 위해 아랍의 협력을 더 중시했다. 그런 이유로 유태민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막았다.
 
모이네 경의 암살 결과로 하가나 조직이 이르군단(유태군사조직)을 납치, 심문하고는 영국군에게로 넘겨주었다. 이 기간을 사냥시즌이라 부른다. 이때 이르군단은 내부적으로 그런 하가나에 절대 대항하지 말도록 명령내렸다. 그로써 하마터면 번질 뻔한 유태인들간의 내전은 차단되었다.
 
2차대전의 결과 25만명의 유태인이 유럽에서 정처없이 방황하게 되었다. 트루만과 앵글로 미국 위원회의 요구에 영향받은 세계 여론에 불구하고 영국은 십만명의 근거지를 잃은 유태인들에 대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토록 한 법안을 해지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유태인들은 단합하여 영국에 대한 여러 차례 공격을 실행했다. 1946년 이르군단이 예루살렘의 다윗호텔을 폭파했다. 거기는 영국군 사령부가 있었으며 92명이 죽었다.
 
그 결과,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기로 선언하고 1948년5월 철수했다.
 
유엔하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 유태인 분쟁을 종식키 위해 특별위원회(UNSCOP)구성. 아랍독립국 창설과 유태독립국 창설의 목표 및 예루살렘을 유엔 감시하에 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두번째 것은 오스트리아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냄으로써 첫째 목표만 채택되었다. 그 결의는 유엔총회에서 각각의 구역 분할이 확정되었으며 독립국 개시는 영국군 철수일로부터 시작하는 걸로 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령 지역에 대한 분할 계획은 팔-아랍 지도자들과 대부분의 아랍인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유태인 특사와 유태인 다수는 찬성했다. 유태인들은 이 결의가 통과된 날인 11월29일을 이스라엘 건국의 중요한 기념일로 친다.
 
영국군이 철수하던 일자에 유태지방자치기구는 유태국가 설립을 선언하고 국경내의 시민들의 권리--그들이 아랍인이건, 유태인이건, 베두윈이나,드루즈인이건 불문코--를 인정한다는 발표를 했다. 1948년5월14일이 이스라엘 국가설립 선언일이다.
 
유엔이 분할한 이스라엘영토와 아랍영토 지도
노란색: 아랍구획. 주황색: 이스라엘구획 
1947[1].png
 
지금의 이스라엘
Is-map.png

 

결론.

 
현재 헤즈볼라 테러집단을 옹호하는 그릇된 시각이 한국인들, 특히 우익 속에 많이 퍼져있는 현상을 경계한다. 그들은 내세우는 논리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사는 무고한 양민들을 내어쫓고 그 땅을 차지했다고 우긴다.
 
그러나, 위의 역사적 내용을 고찰하면, 유태인들의 국가건설, 특히 팔레스타인에의 건설에는 국제간의 약속이 그 바탕이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당시 팔레스타인(지금의 팔레스타인이 아닌 요르단, 시리아를 포함한 넓은 지역 )에 100만명 정도 거주했을 뿐인 아랍인들이 오토만제국의 멸망으로 주인이 없어진 그  넓은 지역내에 2천년간 유랑하고 유럽의 반유태주의로 갈 곳 없어진 유태인에게 유엔과 국제협약이 약속한 국가건설을 거부, 차단하고 나섰다는 데 있다. 그런 아랍인들의 태도가 오늘까지 이어진 테러의 근본 이유이다.
 
게다가 유엔이 정한 분할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서도 네게브 사막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스라엘에 할양된 평야지대는 샤론해안, 여즈리엘 계곡, 요르단 계곡이고 당시는 극심한 산림벌채와 모기떼 번식으로 말라리아가 굉장히 창궐하였고 아랍인들은 기피하던 지역이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인구 구성은 2004년말 조사로 유태인 76.2%, 무슬림 2.1%, 기독교인 1.6%, 드루즈, 러시아 이주민, 소수파 유태인들이 1.6 %이며 아랍인들은 종교자유를 허용치 않는 반면, 이스라엘은 종교자유가 보호되어 있다.  
 
2006.8.13. 파아란 한은경 정리.
 
팔 영국령의 인구구성:
Year Total  Muslim Jewish Christian  Other
1922   752,048   589,177(78%)  83,790(11%)  71,464(10%)  7,617(1%)
1931 1,036,339   761,922(74%) 175,138(17%)  89,134(9%) 10,145(1%)
1945 1,764,520 1,061,270(60%) 553,600(31%) 135,550(8%) 14,100(1%)
 
 
 
[ 둘째 글입니다 ]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가장 흔한 비방은 이스라엘이 수천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 토착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빼앗았다는 주장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팔레스타인 땅의 역사와 현대 이스라엘 건국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면 그러한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은 영국이 일차세계대전 이후(1917) 중동지역의 땅을 점령하면서 부르던 이름일 뿐이며, 현재의 팔레스타인에 살고있는 아랍족과 구약성경에 있다가 사라진 팔레스타인(블레셋족)과는 전혀 다른 종족입니다.

블레셋 족속조차도 구약의 유태인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려고 할 때 이미 그곳에 살던 종족들이 아니라 나중에 들어온 종족이며 그곳에 살던 종족은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므로, 현재 지구상에 남아있는 종족만으로 보자면 그 땅은 유태족에게 우선권이 있는 곳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땅은 여호수아의 인솔로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후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번성기를 거쳐 수천년을 유태인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된 이후로 유태인은 응집력이 사라지면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고, 이 땅은 그 후 여러 왕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로마, 이집트, 바그다드, 유럽십자군의 점령을 거치면서 이땅은 낙후된 벽지가 되었고 질병, 지진, 경제적 궁핍으로 비참한 땅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나무들에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나무들을 다 잘라 내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형편없는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늪지에서는 치명적인 말라리아균이 번식했고 토양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에서도 유태인들은 소수이지만 근근히 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오늘날 터키인 오스만 제국(1517-1917년)의 지배하에서도 약 1000호 정도의 유태인들이 이 땅에 살았습니다.
 
이 유태인 공동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과 이 땅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유태인의 후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스만 제국 초기에 유태인의 생활이 개선되면서 이 지역으로 이주하는 유태인들이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18세기 말경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소홀해지면서 갈릴리의 울창했던 삼림은 없어지고, 늪지와 사막이 경작지를 침식했습니다.

1869년대 이 지역을 여행한 마크 트웨인은 그 당시 이 땅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밤에 양떼를 지키고 천사들이 ‘땅에 평화를, 인류에게 좋은 소식을'이라고 노래하던 거룩한 이곳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없다. 황폐한 땅, 맹수와 살그머니 숨어 있는 여우만이 고독의 침묵 속에 잠을 잔다."

유럽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본격적 이민을 오기 시작한 19세기 말엽 (1882년경), 이 땅은 황폐하고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유태인 이주민들은 유럽 각지, 특히 러시아, 폴란드,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극심한 박해를 피해 도망 온 망명자들이었습니다.
 
말라리아와 질병이 가득한 이 지역의 위생은 형편 없었으며 유아 사망률은 높고 평균 수명은 현저 히 낮았으며 물도 부족했습니다.
 
초기 유태인 이민자들은 불모의 땅을 경작지로 일구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불모지에서 늪지의 물을 빼고 나무를 심느라 과로하여 병들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황폐했던 땅에 수목이 자라고 농업이 가능해 졌으며 일자리가 창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이들의 수고로 점점 더 살만한 땅이 되어 갔습니다.

이 당시 팔레스타인은 하나의 독자적인 민족이 살던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매우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살았습니다.
 
1911년 출판된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 의하면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50개 이상의 언어가 쓰여지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지역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랍과 유태인 이외에도 페르시아, 이집트, 수단, 그리스, 알제리, 조지아 등의 국가에서 온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1500년대에 약 5000명에 불과했던 유태인의 수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할 당시(1914년)에는 85,000명에 이르렀습니다.
 
유태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아랍 정착민도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태인들의 정착으로 불모지가 경작지가 되고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주변 아랍인들을 끌어 들였기 때문입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882년 유태인 가정 40호가 있으면 400호 이상의 아랍 가정을 끌어들였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아랍 사람들은 유태인 마을 주변에 자기들의 마을을 형성하였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의 인구도 증가하였습니다.

요약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기 70년 이래 한번도 독립국가의 영토인 적이 없었습니다.
 
16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터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은 이 지역에는 유태인을 비롯해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19세기 말엽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심한 박해와 시오니즘의 영향을 받은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본격적 이민을 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팔레스타인 땅은 한마디로 인간이 살만한 땅이 아닌 불모지였기 때문에 인구는 너무나 희박했습니다.
 
이 불모지를 유태인 정착민들이 목숨과 재산을 바쳐가며 온힘을 다해 살만한 땅으로 일구어 놓았던 것입니다.
 
<오숙희>
 
 
 
[ 셋째 글입니다 ]
---기본적인 세계사 공부를 해보자는 의미에서, 표로 정리된 것을 올립니다---
 

세계사 속의 이스라엘 역사

 
<기원 전>
13~12세기경
출애굽 이후 히브리인의 팔레스타인지역 정착
 1020 초대 군주제 성립(사울)
 1000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이 수도로 정해짐
960 솔로몬에 의해 성전건설
930 북 유다(2개 지파)와 남 이스라엘(10개 지파)로 분열
722 앗시리아에 의해 남 이스라엘 멸망
586 바벨론에 의해 북 유다 멸망. 유대인의 바벨론 유수 시작(솔로몬성전 파괴)
538 페르시아제국에 의한 정복. 바벨론으로부터 귀환, 성전 재건
332 헬라제국에 의한 정복
63 로마제국에 의한 정복

<기원 후>
70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 파괴, 유대인의 전세계 유랑(디아스포라) 시작
313 - 636 이스라엘 땅을 두고, 비잔틴에 의한 통치
636 - 1099 이슬람에 의한 통치
1099 - 1291 십자군에 의한 통치
1291 - 1516 맘룩에 의한 통치
1517 - 1917 오스만제국에 의한 통치
1918 - 1948 영국에 의한 통치
1917 발포어 선언(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국가 건설을 보장한다고 약속)
1922 UN결의에 따라 유대인의 이민과 팔레스타인지역정착이 허용
1948 5월 14일-영국의 통치 종료, 이스라엘 건국 선포
5월 15일-아랍 5개국(이집트·요르단·시리아·레바논·이라크)의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침공
1948년5월~1949년7월-독립전쟁
1949 이라크를 제외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의 휴전협정
이스라엘의 UN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67 6일 전쟁-예루살렘 탈환

<이스라엘독립과 팔레스타인자치정부설립의 근대사>
1917 발포어 선언(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국가 건설을 보장한다고 약속)
1922 -UN결의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지역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부여받음
-유대인 이민과 팔레스타인지역정착을 허용
1947 -UN은 팔레스타인에 각 각 아랍과 유대인의 개별 국가를 건설하고 예루살렘을 UN에서 분리
-유대인측의 수락/팔레스타인측 거부로 인한 분열의 시작
1948. 5. 14. -이스라엘 국가 건립
-제1차 중동전쟁(이집트·요르단·시리아·레바논·이라크에 의한 이스라엘공격)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70% 확보
-팔레스타인의 주변 아랍국가로의 난민 생활 시작
-독립국 이스라엘, 요르단강 서안지구(The West Bank-요르단 점령), 가자지구(Gaza Strip-이집트 점령)의 3개 지역으로 분할
1956 제2차 중동전쟁(이스라엘의 시나이반도 확보)
1964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팔레스타인해방군(PLA)의 결성. 무장투쟁 선언
1967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 시리아의 골란고원, 요르단의 서안지구 확보
동예루살렘 합병
1973 4차 중동 전쟁
: 이스라엘을 지원한 국가들에 대한 아랍세계의 석유 무기화에 따라 제1차 석유파동
이로 인한 PLO해방운동의 급진전과 요르단 서안지구에 대한 PLO의 주권인정
1975 UN결의-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PLO의 준국가(準國家) 인정
1993 오슬로평화협정(이스라엘과 PLO 잠정자치안 협정에 서명)

*UN과 미국에 의하여 두 민족간의 독립이 이루어지고 여러가지 평화정책노력이 계속되어 왔으며 아라파트 의장과 라빈 총리는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의적 평화보다, 직접적인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지하세력과 테러세력에 의한 사고가 빈발하면서 평화협정은 유명무실되어 오늘날까지 갈등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출처 : Tong - taurus1305님의 중동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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